“마음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회복 이야기”

겨울이야기

2021.03.16 조회수:1309

회복 수기

겨울이야기

글  :  이  인  숙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글 쓰는 시간은 아니다. 햇살이 문틈에 끼여 거실 바닥에 가늘게 널브러져 있다. 집안에 아무도 없다. 빈 집에서 혼자 있으며 거실에서 운동을 핑계 삼아 왔다 갔다 걸음을 떼고 있었다. TV도  컬러가 아니었고 TV에 열을 쏟는 기분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시간을 보내시려 밤낮으로 on 시켜 키는 TV는 나에게 흥미를 주지 않았다. 겉으로 좁은 시간을 키우기에는 내 자신 너무 어두운 기분으로 침착하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었고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거울이 현관에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고 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빨려 들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빠진 자신은 거울 속에 무서운 악령이 비추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을 들여다봤을 때 나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향해 마포대걸레를 집어 올려 힘껏 내리치는 순간 거울이 박살 났다. 그렇게 해 놓고 뒤에 무엇을 했을까 안방에 들어가 잠을 잔 것 같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잠을 깨어 있던 때에 어머니께서 거실에 주저 앉아 엉엉 우셨다. 큰 거울을 박살 냈으니 거울이 아가까워서 우시는 것 같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우시는 것은 나의 정신상태가 나빠져 있었던 것을 탄식하시는 것 이다. 아버지는 일찍 타계 하시고 언니 오빠들은 다른 집에 살고 계셨다. 포악해진 자신은 우시고 계신 어머니를 달래 드리지 않고 멍하니 서서 지켜보았다.


"하늘이 검게 보이고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았다. 맥이 없고 흥미가 없었다"

대학 입학시험이 있던 때를 나를 기억했다. 대학 자격시험에 낙방하고 미술학과를 택했을 때 나는 우울한 기분 하늘이 검게 보이고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이 어두운 실체가 나였다. 서울 OO여자 대학에 실기 미술 회화를 화폭에 담는 시간이다. 나는 조소과를 택하여 실체 두상을 조각하는 시간에도 잘해냈다. 그러나 맥이 없고 흥미가 없었다. 그 마음이 달라지지만 않았어도 내가 가야할 길에 자신을 걸었으면 내 삶은 평안했을 텐데 나는 다른 머릿속이 되어 버려져 있었다. 쥬리앙을 뎃상하면서 박O석 화백에게 회화 시간을 잠깐 익혔다. 그 밑천으로 실습을 향해 나는 무덤덤한 기분으로 실전에 임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악령에 쏟아 시험실에 들어가는 나는 포악해지고 아무 능력도 생기지 않았다. 화폭에 슬픈 마음을 담으렸던가 회색과 검은색으로 집중 할 수 없는 참담하고 마귀를 끌어내고 싶은 정신에 온전히 어두운 색깔만을 화폭에 드러내면서 울고 싶어졌다 면접을 보는 시간에 늦었다. 면접실에 들어가면서 잔뜩 주눅 들었다. 강의실에 세 명의 교수님이 앉아 계셨으며 나를 향해 질문을 하였다. 그 때 이명으로 들렸다. 큰 언니 목소리, 언니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가 환청을 처음으로 겪었다. 큰 언니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인숙이 이 시간이 무엇을 하는 것 인지 생각을 안해 본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나와 둘이서만 대화 하는 것 같았다. 이명에 시달리던 그 때 그 기분을 식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신 뒤 나는 뒤틀려진 정신 상태로 마음에 어둠이 적셔 있었다.그 후 가족들 간에 대화도 없었고 내 방에서 나오려 않고 문학전집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토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카프카의 성 (城) “변신” 등을 읽으면서 하루하루를 망상에 빠져 있었야 했다. 이명을 쉽게 들어야 했을 때 가족에게 알려 병원 진찰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미 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분열증. 조현병이라 고쳐 부르는 정신 쇠약 상태였다. 백 OO박사 신경과에 나의 끝 없는 병원에 환우로써 약물 복용자가 되었다. 그러나 병원비가 70만원이 한 달 진료비가 되었다. 나는 무감각하게 그 병원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려고도 알 수 도 없이 입원까지 하면서 나는 희희낙락 하면서 식구 누구를 위해서라도 기도하지 않았고 나는 완전히 미친 여자가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입원 생활이었다. 그 때쯤 배박사님과 독대를 할 때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박사님이 물으시면 나는 시를 쓴 것을 보여드렸다. 거듭하니 박사님께서 인숙씨는 시를 잘 쓰고 계시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나의 시상은 혼자이기만을 바라는 온전한 삶이 아닌 대학에 입시 시험 당시 좋았던 모든 기억이 산만한 쓸모없는 경험이 되었다.


"가족들은 초긴장을 하여 쉬쉬하면서 나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나의 병을 알고 계신 듯 했다. 가족들은 초긴장을 하여 내 주변을 쉬쉬 하면서 나를 외면했다. 단말기 배터리가 다 나가고 없어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음악을 듣기 좋아 했던 시절에 병원에서는 나를 둘러쌓고 그 중에 좋다고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관심 밖의 일이라 생각하고 나를 좋다고 하는 사람을 떼어냈다. 음식이 환우들에게 잘 맞도록 배고프지 않게 차려졌다. 병원비가 많이 나오고 있었는데도 어머니가 부담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나 생각 없이 무지한 인물이 아닐까 하루는 병원 탈출을 시도했다. 점심을 먹은 후 아줌마가 주방을 지키고 있을 때 나는 쉽게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냥 무조건 뛰어 반트럭 차가 출발 할 때  그 차를 타고선 아저씨에게 남편과 싸워 친정에 가는 길이니 도로까지만 태워 주집사 했다 입원은 병원에서 떨어져 있는 화곡동 주택가였기에 가능했다 입원한 집에서 사람이 나와 나를 찾는 듯 하였다. 나는 얼른 몸을 숨기고 '남편이 나를 찾는 것 같습니다' 하고 거짓을 말하고 기사 아저씨를 졸랐다. 아저씨는 차를 시동 걸고 뒷길로 빠져 나왔고 나는 조금 가다 다른 동네에서 내렸고 화곡동이 아닌 다른 주소로 가는 버스를 마냥 타고 노량진으로 돌아왔다. 집에 무사히 도착하여 내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무도 없는 것은 예전과 똑 같았다. 사실 형부가 돌아가시고 언니와 주변 가족들은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얼마나 식구들은 형부 타계를 가슴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데 눈물이 나는 일인지 모를 정도이다. 정신적 지주였으니 말이다. 나 없는 사이 언니네 식구는 그 안락한 집을 팔고 아파트 11층으로 이사를 하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언니의 집에 데려갔다. 그 때 나는 이혼을 한 직후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들을 다 남편에게 맡기고 집에 돌아왔다. 행복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정을 주지 않고 뒷바라지도 않은 채 나는 무신경하게 아이들을 홀대하였다. 그것은 이미 병에 자리 잡힌 것이었다. 완전히 정신을 놓치고 엄마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청하고 아무런 감각없이 식구들에게 짐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힘들어 하셨고 나도 집에서 지내기가 어려웠다. 내 생각에 어느 요양원이나 갔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나는 배가 고팠다. 어느 날 큰 오빠와 이모가 나서 나를 대방동 부녀보호소에 이동 시켰다. 그곳에 도착 했을 때 나는 정신들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곳에 몸 담게 되었을 때 이렇게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절망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 입소한 지는 햇살 좋은 5月2日 잊지는 않는다.

 



"기도를 즐겨 신앙생활에 믿음을 키우고, 10년이 넘게 시를 쓰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1985년 조카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뼈아픈 시기를 지내면서 3개월 지났을 때 부녀보호소가 이동한다며 천 여 명이 명찰을 새로 달고 경찰차에 올라 그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8月달이었다. 드디어 용인까지 달려온 것이 나의 일생의 두 번 변하는 시기였다. 서울시립영보자애원 처음에는 그냥 자애원에 살게 되었으나 세월이 몇 번 흘렀을 때 자애원은 분리되었다. 힘들게 자애원 생활이 나를 불쌍하게 만들었으나 그렇지 않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성당에 나가면서 신심을 키워 예수님을 마음속 머릿속에 담기 시작하였다. 대모님을 영적 부모님을 대신했고 대모님과 마주하는 시간을 내 가족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 듯 위로를 받았다. 자애원 생활은 식구들이 많았고 힘이 들었다. 나는 봉사를 하면서 하루하루 꿈이 없었다. 결국 나는 생활을 할 수 없이 결핵에 몸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1년이 지났을 때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때쯤 나는 동생편지를 받아 볼 수 있게 되고 피붙이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미국에 이민 간 오빠 동생의 생활이 쉽지 않아 보였다. 동생은 목사 강사로 생활 하면서 힘드나 보람된 삶을 사는 것 같으면서도 몸이 자꾸 아프다고 편지가 왔다. 나는 아무것도 무슨 짓을 할 수가 없었어 동생에게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나는 틈이 없었다 밖으로 외출 할 수 있는 계기도 여유도 없어서 동생이 아프다는 일에 행동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오로지 대모님들의 방문에 감사하고 위로의 힘을 얻으면서 지냈다.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기생충 같은 삶을 살았던 자애원 생활은 발전이 없고 힘이 부쳤다 그 사이 정신요양원으로 이동하였고 나는 힘이 닿는 데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결핵을 앓면서 책을 읽고 미사 시간에 제1독서를 맡으면서 신앙 생활에 열심히 식구들을 위한 기도를 즐겨 믿음을 키웠다. 어려운 시기에 매점일과 전례부에서 전례 해설을 맡고 독서를 하면서 나는 시를 창작하여 매년 5月에는 시를 봉헌하게 되었다. 10년이 넘게 시를 쓰면서 마음이 안정되어 갈 때 수녀님의 보살핌에 시인이 될 수 있는 시집을 발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열심히 시를 쓰는 것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제의를 하여 나는 시 쓴 것을 모아 책을 내게 되었고 “자유문예”지에 시를 공모하였을 때는 나는 문학지에 등단을 하게 되어 정식 시인이 되었고 나는 부지런히 시를 쓰고 등록하여 김교수님의 창작 교육 방식으로 공부가 10년간 계속 되었고 내 주변에 선생님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 동안 시집 세권을 발표하면서 나는 밝은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2020년 경자년에 코로나19 확산으로 외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문학지에 등단을 하게 되어 정식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돼서야 자신의 자리를 든든하게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약물 복용은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다.
약물 부작용은 손을 떨리게 한다든가 입술이 떨리게 한다던가 밤에 다리가 저리는 정신적인 불안감을 가져 왔다 남자 선생님의 약 복용은 많이 안정감을 잃게 하였다. 몇 년 뒤 원장 수녀님이 바뀌고 정신과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으로 바뀌고 나서 우리들은 안정된 분위기를 가져왔다. 나 자신도 약물 부작용은 서서히 사라지고 생활도 넉넉하고 원택한 생활이 되어 가는 듯 했다. 영보시립정신요양원의 보람 있는 삶이 긍정적인 바탕위에 오직 한자들의 원기 있는 틀을 짜 맞추어 선생님과 봉사자들의 관심 있는 보호는 확실히 효과를 보는 것이다. 외출자를 분리하여 자유롭게 버스 교통 카드를 소지할 수 있게 하여 마트에 출입할 수 있는 지속적인 생활태도를 사회 밖으로 눈을 돌리어 자율적인 마트이용, 파마 미용의 이용 등 영화관람, 은행 이용하기, 시장 장날에 참여 해 보기 등 여행 즐기기, 해외여행 3박4일 동안 우리나라 밖의 외국에서 잠을 자보기, 비행기 타보기, 제주도에 몇 번이고 2박3일, 1박2일 등 우리는 날개를 달고 쭉쭉 뻗어 나갔다. 처음 비행기를 탑승하였을 때의 그 기억은 짜릿한 마음의 평화를 함께 하였다 외부 생활로 더욱 단단해진 우리 환우들은 어느 요양원에 뒤지지 않은 긍정적 발전을 도모하여 생활에 단정하고 빛이 나 있었고 자율적인 봉사와 프로그램 참여에 많은 삶의 질을 교육과 더불어 영적으로 질적으로 높이 사게 바람직한 생활 발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시인이 되어 있는 나는 고뇌를 다해 시를 발표하였고 외부에서 인정해 주는 자신의 시 세계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생활 패턴은 동료 환우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스스로 자신을 UP 시키는 자세로 시를 쓰는 새로운 친구도 생기는 활발한 시립영보정신요양원이 되었고 외부에 나가서 미술 공부를 하여 화가가 되는 경우도 생겼다. 나라에서 일찍 손을 써주셔 일반인들의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우리들의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약물 효과도 있지만 주위에서 많은 관심과 주위가 협력하여 자존감을 높이는 작은 신경까지도 생각하는 도움이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겨울 이야기는 서서히 봄날로 이루어져감과 동시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손을 드는 방법만 남아 있고 조현병에서 벗어나고 있다.
 


<마인드포스트>주최, 제1회  정신장애인 문예대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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